셀 수도 없이 떨어지는 일거리에도 불구하고 르 꼬르뷔제의 '작은집Une Petite Maison'을 읽다. 책이 얇으니까, 라고 스스로, 일단, 변명해두다.
Le Corbusier, 작은집, 황준 옮김, 미건사, 1993.
1. 작은책
이 책은 르 꼬르뷔제가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1923년에 남프랑스에 지었던 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책이 얇음에도 수많은, 집이 가져야 할 거의 모든 기능들에 대한 고려와 더불어 사진과 수많은 스케치들이 들어 있어 쉽게 읽힌다. 또한 건축이라는 왠지 실물감을 가진 분야의 대가답게 뿌옇기만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는 순간을 보여주어 재미있다. 마치 비가 눈으로 바뀌는 순간이라든지, 연필이 종이에 닿아 죽죽 글자를 만들어내는 순간이라든지, 피아노 건반을 움직이는 손가락이 하나하나의 음을 건드려 하나의 음악을 만드는 순간이라든지, 뭐 그런 것들. 구체성을 띠지 않았던 것들이 모양을 갖추고 의미를 뿜어내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늘 완성된 무엇은 단지 고정된, 완결된 의미만을 던지지만 변화가 담겨있는 생의 자잘한 순간들은 내겐 눈길을 그치게 만드는,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가도록 하는, 누군가를 이해할 힘을 던져주는 힘이 있다.
2. 르 꼬르뷔제와 근대
근대란, 혹은 근대의 특수성이란, 내 생각으로는, 인간이 어떤 이상을 구체화시키는 방식에 있는 것 같다. 상상할 수 있는 조작적인 요소의 최대화, 라고 하면 될까. 인간의 이성이 '기획'하여 그려내는 것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작적이고 변형적인 방법을 통해 현실화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시대. 인간 노동력의 연장으로서 자동적인 기계가 그렇고, 꼬르뷔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집에 대한 가장 기능적인 고려 같은 것이 그렇다. 물론 이는 주어진 자연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 혹은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가 현실화되어 눈앞에 실존되는 놀라움. 자연을 그대로 두고 그 주변에서 인간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대범하게 주택의 기능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일정정도 거스르는 그러한 태도.
개가 지나다니는 길과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아 가족의 일원으로서 개를 건축상의 고려 대상에 포함시킨다든지, 벽면에 정사각형의 창을 내고 벽을 또 갑자기 없어지게 해,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은 풍경'을 만들어 "정말, 내 생각대로 되어 멋있구나!" 라고 감탄하고 있는 꼬르뷔제의 태도는 기존의 관습보다는 주택의 기능에 충실하겠다는 생각의 반영이자 미(美)적인 요소를 인공적으로 컨트롤하고자 하는 소망의 투영이다.
3. 주택 또한 감기에 걸린다.
하지만. 이러한 미래주의자, 근대적인 모더니스트인 꼬르뷔제의 태도가 늘 차가운 것만은 아니다. 그는 조심스레 자연과 자신의 형상물 사이의 관계를 모색한다. 조심스레 주택을 살펴보면 어떤 부분은 금가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근처 호수의 물 때문에 감기에 걸리기도 한다. 늘 중요한 것은 구조물과 주변의 상호작용인 것이다. 또한 가장 개인적인 주택으로서 '작은집'은 단지 이상과 기획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가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마치 부모 앞에서 노래를 불러드리거나 그분들께 편지를 써드리는 듯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단순한 건축의 기록이 아니다. 이 작은책은 그래서 가치가 있다. 단지 이념의 실현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복잡한 차원의 슬적 내비침. 마치 이것이 삶이다, 라고 말하는 듯 하다.
4. 여분 : 옥상정원
이 책을 통해 얻은 하나의 쓸모 있는 지식은 '옥상정원'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 30년대쯤 백화점 같은 곳 옥상 위에 있었다는 옥상정원은 '정원'이라는 이름의 뉘앙스가 주는 왕족스러움과 백화점 옥상이 주는 어떤 모던함의 이미지 때문에 가끔 논의되어 왔지만, 적어도 르 꼬르뷔제의 '작은집'에선 옥상 위를 20센치 정도의 흙으로 덮어 제라늄을 심은 것이 불과했다. 그것도 멋, 이 아니라 철저한 기능이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흙과 식물이 막아주는 것. 李箱이 이것을 봤다면 머리를 탁 치며 한숨지었을 것 같다. 왠지.
-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2.3에 올렸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