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에 어떠한 목적이라도 있다면 고통과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반드시 목적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반드시 각자가 스스로 이것을 찾아내야 할 것이며, 그 대답을 전제로
하는 책임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가 찾아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는 온갖 모독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클은 즐겨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태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2. 만약 지금 그 누가 있어서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
의 인간에 대한 평범한 정의의 진실성을 우리에게 물어 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적응했는가는 묻지 말아 달라."
3. 강제 수용소에서 살았던 우리들은 막사 앞을 지나가던 죄수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던진다든가,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빵조각까지도 주고 가던 광경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한 가지 만족할 만한 확증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주어진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기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4. 미래-자기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 버린 죄수는 파멸이란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될 운명이 정해지게 마련이었다. 미래에 대한 신념을 상실함과 더불어
그는 그의 정신력까지 상실하게 되었다. 그 자신으로 하여금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인 부패의 온상으로 변했다. 대체로 이와 같은 현상은
위기라는 형태로 매우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이런 현상의 징후는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던 재소자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5. 한 사람이 자기가 겪어야 할 운명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그의 고통을
자기의 과엄으로, 유일하고 독특한 과제로 반드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괴로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라도 이 우주에서 오직 유일한 그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그를 그의 고통 속에서 구할 수 없을 뿐더러
그의 위치에서 그의 고통을 대신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를 바로 그가 무거운 짐을 떠메고 나아갈 길에 놓여 있는 것이다.
6.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과 계속 살아 남아야 할 책임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한 사람이
그를 지극한 애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인간에게나 완성되지 않은 작엄에 대해 지고
있는 책임감을 의식하게 된다면 그는 결코 자기의 삶을 내던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그가 실존해야 할 '이유'를 알고 있으며, 어떠한 곤경에도 참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서에서>